티스토리 뷰

「밝은 밤」

셍셍칩 2021. 8. 26. 12:33

「밝은 밤」

최은영

★★★★☆

읽은 기간: 21.08.19~20 / 2일

 

 한동안 책을 빌려만 읽었었는데 이번 백신휴가도 있고 9월엔 2차 백신휴가도 있고 추석 연휴도 있어서 뭔가 시작적 여유가 풍족한 기분이 들었다. 그랬더니 맘 편하게 책을 쌓아놓고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오랜만에 알라딘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대여하고 반납하고 하다보면 좀 불편하니까. 사이트 로그인을 하고 쓱 한 번 살펴보려는데 바로 최은영이라는 세 글자를 발견하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쇼코의 미소」 이후 나의 최애 작가님이 된 최은영작가님이 첫 장편을 내셨다니. 고민할 것도 없이 장바구니에 담고보니 그제야 정유정님 신작도 눈에 띄고 프레드릭 배크만의 안 읽어본 책들도 눈에 띄어서 하나하나 열심히 담았다. 스무살 때 빠져있던 츠지무라 미즈키도 갑자기 생각나서 담고... 그러다보니 소설책 열한권에 알라딘에서 빠질 수 없는 굿즈들까지 사버려서 택배 뜯을 때 얼마나 신났는지... 새로 소장하게 된 책들을 줄세워놓고 내 전용 도장을 찍을 때까지도 엄청 뿌듯했다. 그런데 그 때까지 미처 다 읽지 못했던 「아가미」를 마무리 하고 새로 시작할 책을 집어들기 위해 책장을 들여다보는데 제일 즐거워야 할 그 시간에 잠시 고민했다. 결제할 때만 해도 배송되면 당연히 「밝은 밤」부터 읽어야지 했었는데 막상 읽으려니 손이 선뜻 나가지 않았다. 나는 아직 마음이 조금 불안정한데, 혹시 작가님의 글이 내 마음을 후벼팔까봐, 줄거리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샀는데 혹시라도 슬픈 내용일까봐, 내가 최은영의 세계로 끌어들인 한 친구가 「밝은 밤」 후기만 읽고 사람들이 많이 울었다더라- 하는 얘기를 전해줬었는데 물론 난 남들과는 조금 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어서 좀처럼 울만큼 슬프진 않겠지만 그래도 행여나 마음이 울적해질까봐, 그냥 좀 가벼운 책을 먼저 시작하는 게 나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멈칫했다. 그래도- 그래도 역시 가장 읽고 싶었고 기대했고 기다렸던 책을 먼저 읽는 게 순서겠지 해서 뽑아들었고 읽었다. 이틀동안. 「밝은 밤」.
 이번에도 어김없이 최은영작가님이 내세우는 화자는 여성이었지만 요즘처럼 작은 거 하나에 서로 예민하게 물어뜯는 (중립인 입장에서 볼 때 솔직히 성별 싸움을 조장하는 기사나 댓글, 커뮤니티들을 보면 하는 짓이 남자나 여자나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세상에서 성차별적인 요소나 논란을 불러일으킬만한 내용은 딱히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조심하고 심혈을 기울이셨겠지만.
 작가님의 이전 작품들에서도 느꼈듯 이번 작품에서도 작가님의 방대한 지식과 자료 수집 능력이 엿보였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느낌이랄까. 난 역사엔 영 젬병이고 그런 내가 싫으면서도 배우려는 노력은 안하는데 그래 작가를 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할 수 있지 하는 기분을 매번 느끼게 해준다. 엄청난... 큰 산을 보는 웅장한 기분? 그런 걸 느끼게 해준다. 작가님이 이걸 보실 일은 없겠지만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사실 너무 좋았는데 내 마음 속의 기준이, 특히 최은영작가님에 대한 기준이 「쇼코의 미소」로 너무 확고해서 별 다섯개를 줄 순 없었다. 「쇼코의 미소」가 너무 넘사였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문체는 여전했지만 「쇼코의 미소」나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은지 너무 오래돼서 그런지 작가님 그 특유의 느낌을 이 책에서 많이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고보니 한 번 다시 읽어봐야겠다 싶네. 작가님의 단편에서 느꼈던 그 울림이 장편이라서 더 길게 가는 게 아니라 '짧고 굵게'가 '얇고 길게'로 바뀐 느낌을 조금 받은 것도 같다. 내가 좋아했던 최은영 특유의 느낌이 사라지고 다른 사람이 쓴 글 같다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그렇다고 나빴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한국의 아주 과거 이야기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과거에 쓰여진 편지가 나온다는 점에서, 최근에 읽은 신경숙님의 「아버지에게 갔었어」가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내용은 전혀 달랐지만. 여기까지 쓰고보니 줄거리 리뷰를 대체 어떻게 써야하나 좀 막막하다. 이 책을 다 읽고 넘어간 「완전한 행복」도 꽤 많이 진행돼서 밀리기 전에 오늘 다 써버리고 싶은데 할 수 있을까... 왠지 이번 리뷰는 줄거리는 짧고 느낌은 긴 그런 리뷰가 될 것 같다. 이 블로그의 취지는 줄거리 기록 용도인데 자꾸 그게 잘 안되네...
 열 살 때 딱 열흘간 지연은 엄마의 손에 이끌려 외할머니가 사는 희령에서 지냈었다.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지연을 맡겨둔 채 잠시 어디론가 시간을 보내러 떠나있었고 지연은 그 열흘간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쌓았다. 하지만 엄마와 외할머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지연은 그 이후 할머니를 볼 수 없었고 지연에게 희령과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열 살을 기점으로 끊겨있었다.
 그리고 현재, 남편의 바람으로 이혼을 하고 희령에 있는 천문대 연구소에 지원하면서 지연은 어린 시절 어렴풋한 기억으로만 남아있던 그곳으로 거취를 옮겨 작은 아파트를 구해 혼자 살게 된다. 어느 날 엘레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네던 한 할머니가 지연에게 친근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손녀와 닮았다며 말을 거는데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딸과 손녀의 이름은 뜻밖에도 자신과 엄마의 이름이었다. 지연이 뭔가 깨달은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봤을 때 할머니는 이미 다 알고있다는 눈으로 지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만나지 못한 채 지냈지만 지연의 외할머니는 굉장히 유쾌하고 독립적인 사람이었다. 긴 긴 세월 연락이 끊겼던 손녀가 자신을 부담스러워할까봐 귀찮게 굴지 않으려 노력했고 지연이 원할 때만 만나려했다. 그러면서도 지연이 거리를 두는듯한 행동을 하면 상처받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왜 엄마와 할머니가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얼굴도 보지 않고 살았는지, 자신의 결혼식에 할머니를 초대하지조차 않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궁금증에서 시작한 지연의 호기심은 자신의 뿌리를 타고 올라간다. 오랜만의 조우 이후 지연은 그렇게 할머니를 통해 할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지연의 증조할머니가 어떻게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게 되었으며 증조할머니와 할머니가 어쩌다 희령에 정착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옛날 이야기 듣듯이 들으며 엄마와 할머니, 증조할머니의 인생을 엿보게 된다. 지연은 엄마와도 아빠와도 닮지 않은 자신이 누구를 닮았는지 늘 궁금했는데 외할머니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꺼내준 사진 속에는 40대로 보이는 두 여자가 찍혀있었는데 그 중 한 여자는 지연과 아주 똑 닮아있었고 그 여자는 바로 할머니의 엄마이자 지연의 증조할머니였다. 
 증조모는 백정의 딸이었다. 증조모에게 백정의 신분을 물려준 고조부는 일찍 돌아가셨고 고조모와 단둘이 살던 증조모는 아직 10대였던 어린 나이에 기차역에 나와 옥수수를 팔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런 증조모를 남몰래 바라보던 사람이 바로 학생이었던 증조부였다. 양인이자 집안 자체가 가톨릭 신자였던 증조부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교리를 배우며 자랐고 백정 출신이라는 표식을 달고도 당당하게 자신에게 말을 거는 증조모의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 때는 광복 전이었고 일본군이 결혼하지 않은 어린 여자들을 잡아가던 시절이었다. 사회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도는 눈치 챌 나이었기에 증조부는 증조모가 며칠 내로 일본군에게 끌려갈 위기에 처하자 잘 알지도 못하는 그녀와 결혼을 결심한다. 이 일로 가족들은 증조부에게 등을 돌리고 증조부는 무턱대로 증조모의 손을 잡고 친척집이 있는 개성으로 향한다. 증조모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병석에 누워있는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고조모를 버려둔 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그건 평생에 걸쳐 죄책감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런 고조모를 돌봐준 남편의 친구 새비 아저씨를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게 된다.
 개성으로 건너 온 후 초창기만해도 사람들은 증조모에게 친절했으나 백정 출신인 게 소문이 나자 주변 사람들은 한순간에 돌변한다. 증조부가 있을 땐 티내지 않아도 증조부가 없는 자리에선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증조모를 외롭게 한 것은 비단 주위 사람들 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에 쫓겨, 가톨릭 교리에 심취해, 자신이 신념이라고 믿는 가치관에 따라 크게 헤아려보지 않고 취했던 행동을 증조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자신보다 남을 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내도, 심지어 이후 태어난 딸도, 결코 자신보다 소중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증조모는 그런 남편 때문에 언제나 외로웠지만 남편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는, 그 빚 하나로 모든 걸 감수하고 참아내며 살아간다. 
 그런 증조모에게 처음으로 친구가 생긴 건 새비 아저씨가 아내인 새비 아주머니를 데리고 개성에 나타났을 때였다. 새비 아주머니는 편견 없이 증조모의 고향 지명을 따 삼천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다. 이미 사람에게 숱하게 상처받았기에 삼천은 새비에게 자신의 출신을 먼저 드러냈지만 새비는 이미 알고있다며 그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평생의 친구가 되고 삼천이 지연의 할머니인 영옥을 낳은 3년 뒤 새비가 희자를 낳으면서 함께 육아를 하고 돈벌이를 하며 지낸다.
 새비 부부는 금슬이 좋았다. 새비 아저씨는 새비를 진정으로 아껴줄 줄 알았고 새비 역시 남편을 사랑했다. 증조부가 허튼 짓을 안하고 다닌 이유 중에 하나는 어쩌면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새비 아저씨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두 가족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잘 지내오던 몇 년이 흐르고 새비 아저씨는 본가의 빚을 갚기 위해 일본행을 결정한다. 증조모는 절친한 새비를 위해 새비 아저씨를 설득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새비 아저씨는 그렇게 일본으로 떠난다. 남겨진 새비와 희자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남편의 결정을 끝까지 반대하던 새비는 떠나는 남편을 배웅조차 하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새비 아저씨는 예정돼있던 기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자리를 잡고나자 생각보다 돈벌이가 괜찮았기 때문에 조금만 더 고생하면, 조금만 더, 라는 생각이었을테지. 그렇게 1945년, 새비 아저씨가 있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사건이 터진다. 증조부는 백방으로 새비 아저씨의 생사여부를 확인하려하지만 연락이 닿지 않고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새비 아저씨가 처참한 몰골로 개성에 나타난다. 새비 아저씨는 예전의 새비 아저씨가 아니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새비 아저씨는 원폭 투하 순간에 지하에 있어 죽음은 면했지만 그 끔찍한 일들을 목도했고 천주님이 정말 계신다면 그 많은 죄없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야 하는지에 회의감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피폭을 당한 상태였기에 새비 아저씨의 건강은 점점 더 안좋아졌고 새비 가족은 고향인 새비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할머니와 증조모, 증조부는 모두 새비 가족과 헤어지기 싫어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에 새비 아저씨의 건강을 빌며 이별했고 새비와 증조모는 꾸준히 편지로 연락을 하며 지냈다.
 그렇게 얼마 뒤, 새비는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한다. 새비는 남편이 죽고 슬하에 하나 있는 자식도 아들이 아닌 딸이었기에 시댁에서 쫓겨났고 친정집에 가서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새비와 증조모는 몇 년 후 다시 만나게 된다. 새비가 희자를 데리고 느닷없이 증조모의 집 문을 두드린 것이다. 아직 어려 물색없는 희자의 말에 따르면 새비의 오빠인 외삼촌이 빨갱이로 몰려 처형당했다고 했다. 새비는 자신의 오빠는 사상 같은 거 모른다고 주장했지만 증조부는 언제까지고 있어도 된다던 처음의 말을 재깍 수정해 며칠의 말미를 줄테니 떠나라고 말한다. 새비 역시 남쪽에 있는 고모님댁으로 갈 것이라고 했기에. 증조모는 그런 남편의 행동에 환멸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었고 그렇게 새비와 희자가 죽음일지 삶일지 모르는 곳으로 떠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6.25 전쟁으로 온 나라가 난리통 속이었기에 증조모 가족도 남쪽으로 피난을 결심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이었기에 키우던 강아지도 버려둔 채 떠난다. 하지만 가까스로 도착한 목적지에는 가족들이 없었고 절망 속에서 증조모 가족은 염치없지만 새비와 희자가 남긴 주소로 향한다. 다행히 새비의 고모님은 그들 가족을 받아주었고 오랜만에 다시 만난 증조모와 새비, 할머니와 희자는 다시금 우정을 나눌 수 있게 된다. 할머니는 그 곳에서 새비의 고모님인 명희 할머니에게서 옷을 수선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그 곳이 증조모 가족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원입대를 한 증조부는 전쟁에 나갔다 돌아와서는 군대에서 만난 고향 친구에게서 자신의 부모님과 형님이 희령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희령으로 떠나자고 말한다. 그렇게 증조모 가족은 다시 한 번 새비네와 이별하게 된다.
 하지만 희령에 증조부의 가족은 없었다. 증조부는 집을 구하고 일자리를 구해 가족들을 건사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지만 잘못된 소식통이었는지 부모님은 희령에 계시지 않았다. 그렇게 할머니 가족은 희령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할머니는 희령에 살며 희자와도 편지를 꾸준히 주고받는데 희자는 공부를 잘해 학교에서 성적이 매우 좋다고 했다. 희자의 편지는 할머니 자신을 점점 초라하게 만들었다. 왜 그렇게 빨리 공부를 포기했는지, 왜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지. 그럴 때 즈음 증조부와 친하게 지내던 길남선이라는 자가 증조부에게 딸을 달라고 하고 증조모는 남선이 평판은 좋지만 여자를 아껴줄 부류가 아니라며 반대하지만 할머니는 자신의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그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한다. 남선은 정말 딱 아버지같은 남자였으므로.
 첫 아이이자 마지막 아이인 지연의 엄마 미선을 낳았을 때, 처음보는 여자 둘이 집에 찾아온다. 그들은 남선의 고향인 북에서 온 남선의 엄마와 남선의 본처였다. 전쟁 중 남쪽으로 내려온 남선은 가족들이 북에 있는 줄 알고 결혼한 적이 없는 척 영옥에게 청혼을 한 것이었는데 여기서 할머니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증조부가 모든 것을 알고도 남선을 허락했다는 것이었다. 남선은 나중에야 본처와 자식, 부모가 다 남에 내려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영옥이 아닌 본처를 선택했다. 남선의 엄마 또한 손녀가 아닌 손자를 선택했고 영옥은 미선은 자신이 키울 것이라며 남선을 잡지조차 않았다. 다만 어떻게 손을 써보기도 전에 남선이 이미 미선을 남선과 본처 소생의 아이로 호적에 올렸기에 영옥은 미선을 키우면서도 단 한 번도 미선의 엄마로 살 수 없었다.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고 일방적인 중혼을 당한 입장이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사회는 할머니를 외면했고 할머니를 문제 있는 사람으로 매도하려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타고난 성격으로 꿋꿋하게 살아갔다.
 다만 지연의 엄마인 미선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평범한 삶을 꿈꿨다. 그랬기에 종갓집 며느리로 들어가 온갖 구박을 받고 무시를 당해도 참고 견디며 살아간다. 그런 것들이 할머니 영옥과는 다른 점이었고 그런 문제로 모녀는 많이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고 서로가 싫어서가 아니라 이해하지 못했기에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삶을 꿈꿨던 만큼 미선은 지연에게도 그런 삶을 강요했다. 지연이 어렸을 적 지연 가족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바로 지연의 친언니의 죽음이었다. 어린 지연은 죽은 언니가 보였고 늘 곁에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 말을 했을 때 엄마는 그 싹을 단박에 잘라버렸다. 그런 강요는 지연의 삶에 전반적으로 드리워져있었다. 가장 최근에 그런 강요로 지연의 마음을 가장 상처입힌 것은 엄마가 사위의 바람으로 딸이 이혼하는 상황에서도 딸이 아닌 사위를 걱정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그래도 지연이 희령으로 떠나온 후 엄마의 암이 재발하고 멕시코로 이민간 엄마의 친구가 잠시 귀국하면서 엄마에게도 조금은 변화가 생겼다. 첫번째 암이 발병했을 때도 지연에게 아빠의 식사를 걱정하던 엄마는 이번에는 모든 걸 내려놓고 친구를 따라 멕시코 여행을 떠났고 여전히 딸과의 대화는 핀트가 어긋나지만 이전보다는 조금 나아지는 기미가 보였으니까.
 쓰다보니 엄청 길어졌고 아마 내가 지금 졸려서 기억을 못하는 것 같긴한데 줄거리가 분명 더 있을 것이다. 근데 더 못쓰겠으니 이만 줄여야지... 전체적으로 4대에 걸친 여성들의 서사, 일대기였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대체 왜 엄마들은 딸에게 자신이 했던 희생을 강요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잘 살기를 바라면서, 딸이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살았던 구시대적인 발상 안에 머물러있다. 더 구체적으로 쓰고싶지만 그건 일기에나 써야지.
 주인공인 지연은 나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내 자신에게 관대하고 나태한 나와는 달리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채찍질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지연이었기에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만큼 자신을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고, 그래서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쉬웠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나와 아주 다른 사람의 마음 속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지만 왜 공감되는 느낌이었는지 모르겠다.
 지연은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신의 상처보다 바람 피운 사위의 안위를 살피는 엄마와 어떻게 사이가 좋을 수 있겠는가. 엄마와 대화를 길게 하다보면 어떻게든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기에 함께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 했지만 엄마의 병이 재발해 입원하게 되면서 병간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붙어있는 시간이 생기고 만다. 그 때 생기는 모녀의 대화와 지연의 감정에서 나와 엄마가 떠오르기도 했다. 완전히 다른 상황이고 우리 엄마는 지연의 엄마처럼 나를 대하지 않지만 나 역시 엄마와 살가운 사이는 아니니까. 대체 드라마 속에 나오는 함께 쇼핑하고 데이트 하는 모녀들은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 내 주변에는 안 보이는데. 지연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가부장적인 아빠의 식사를 챙기고 종가집 맏며느리가 되어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도 모든 걸 감수하며 살아온 엄마의 패배감에 젖은 말들을 경멸했고 그걸 자신에게까지 강요하는 엄마에게 환멸을 느껴왔다. 하지만 조금씩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자신의 분노는 엄마가 아닌 엄마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향했어야 했다고, 내가 엄마의 상황에 놓였다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수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남편의 배신으로 깊게 상처받은 지연의 마음은 지연의 예상과는 다르게 시간이 치료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약을 끊자 악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와의 조우, 대화, 과거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깨닫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내버려두라고. 애쓰지 말라고.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거나 더 잘 살아야지 하고 힘을 내려 하지 말라고. 언제나 말로 상처를 후벼파는 엄마와 바람 피운 주제에 사과 한마디 없었던 전남편, 이혼한 딸을 부끄러워하는 아빠로 인해 괴로운 마음을 지연은 어딘가에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거라고 상상하며 자신을 위로한다. 그리고 할머니에 들은 새비 아저씨에 대한 새비 아주머니의 사랑 이야기에서 자신 역시 전남편을 그렇게 사랑했으며 전남편은 그런 사랑을 저버린 사람이라는 걸, 전남편과 서로 잃은 걸 따지게 된다면 적어도 그 경쟁에서는 자신이 패자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며 위안받는다. 누구나 살면서 사랑하는 연인에게든, 가족에게든, 친구에게든, 실망하거나 배신당할 순 있겠지만 이런 방향으로 접근한다면 조금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아 힘들어하던 과거의 나에게 가서 이 신박한 접근법을 알려주고 싶은 생각도 조금 들었다. 어떻게 보면 비약이고 합리화라고 느껴질 지언정 조금의 위로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지연은 전남편의 배신으로 힘들어하고 이혼으로 상처받았을 때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아서 조바심이 났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은 보란듯이 잘 살면 된다고 위로하고 응원했지만 그 응원의 목소리가 지연의 등을 천천히 두드리는 손길에서 어느새 등을 후려치는 채찍이 되었다고 표현했다. 그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나 역시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한 번쯤 해본 말이었고 내가 힘들 때 들어본 말이었기에. 그런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구나. 맞아.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난 마음에 그런 말을 수용할만한 여유가 없었었다. 아마 내가 같은 말을 하는 입장이었을 때 듣는 친구도 그런 여유 따윈 없는 상황이었겠지. 가끔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위로가 될 수 있겠다고, 어줍잖은 응원은 안하느니만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0) 2021.09.08
「완전한 행복」  (0) 2021.09.08
「아가미」  (0) 2021.08.25
「어느 애주가의 고백」  (1) 2021.08.13
「레몬」  (0) 2021.08.06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5/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