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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넘버」

셍셍칩 2020. 5. 9. 20:57

「빽넘버」

임선경

★★★★☆

읽은 기간: 20.04.28~05.08 / 11일

 


 안그래도 가볍게 읽고 싶었는데 실물을 안보고 대여해서 책을 받았을 때 얇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요즘 통 어디에도 집중을 못해서 두꺼운 책은 무리다 싶었는데 여기에 재미까지 있으면 금방 보겠지~ 하면서 시작했다. 근데 재미는 있었는데 대체 왜 읽는데 열흘이나 걸린거지... 진짜 요새 내가 뭘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회사에선 그래 정신없이 일하는데 퇴근하면 대체 뭐하는거지. 쉬는 날에도 그냥 집에서 봄이나 안고 멍 때리거나 침대 속에서 꼼지락 거리는 게 다인 것 같다. 그래도 예전엔 (아무것도 안하더라도) 뭐라도 해야지 하는 콩알만한 양심의 가책 같은 거라도 있었는데 요즘은 정말 아무 생각이 없다. 그래도 아주 가끔 이렇게 활자를 읽긴 읽고 그 덕에 이렇게 뭔가를 쓰긴 쓰는구나...
내용은 어떻게 보면 한없이 무거웠는데 문체가 간결해서 산뜻한 느낌으로 읽었다. 현실에 있을 수 없는 (그건 장담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일반적이지 않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러니까 판타지라고 해도 무방한 내용이었지만 그 안에 녹아들어있는 일상이 너무 현실이라 1g의 거부감도 없이 읽었다. 비현실적인 능력을 갖게 된 주인공의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라 해야 할까.
 대학생 원영은 유복한 집안 외동아들로 아버지와 어머니와 평범하게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왔다. 예쁜 CC 여자친구와 어리다고 해도 좋을 젊은 나이에 훤칠한 외모까지 어찌보면 이런 팍팍한 세상에서 이 정도면 금수저라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그런 청년이다. 원영은 어느 날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장 조문을 가게 되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술 한 잔씩 한 부자 때문에 어머니가 장거리 밤운전을 하게 되는데 졸음운전을 하던 트럭과 사고가 나면서 부모님을 잃게 된다. 부모님은 전복된 차량에 불이 나면서 의식을 잃은 상태라 빠져나오지 못해 죽게 된 건데 원영은 사고 직전 들렀던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들렀다가 뒷좌석에 다시 타면서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고 사고가 나면서 충격으로 차량 밖으로 튕겨져 나가 화를 면한 것이었다. 일주일 뒤 병원에서 눈을 뜬 원영은 부모님을 하루 아침에 잃었을 뿐 아니라 온몸이 부서져 중환자실 신세를 지게 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원영에게는 조카를 돌봐주는 좋은 이모가 있었고 매일 면회 시간마다 찾아오는 여자친구가 있었고 부모님의 넉넉한 유산이 있었다. 어느 날 원영이 있는 중환자실에 한 할머니가 들어오고 똑바로 눕기를 거부해 옆으로 누워있는 할머니의 굽은 등에서 원영은 이상한 글자를 보게 된다. 할머니 등에 옅게 빛나던 숫자는 하루 하루 하나씩 줄어들고 숫자가 1이 되며 빨갛게 빛을 발했을 때 원영은 무언가를 직감한다. 그 숫자는 사람의 수명이었던 것이다. 원영은 이모와 여자친구를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하고 빛이 맨 살에서 더 선명하게 초록색으로 표시된다는 걸 알아낸다. 원영은 자신의 등을 보려고 시도도 하지만 숫자는 거울이나 카메라를 통해서가 아닌 눈으로만 볼 수 있기에 자신의 남은 날은 볼 수가 없다.
 원영의 부상은 굉장히 심해서 중환자실에서 나온 후에도 수술과 재수술을 반복하고 병원을 옮겨 재활병원까지 가서 퇴원을 했을 땐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 사이 원영은 자신에게 생긴 능력에 대해 처음 자기가 병원에 실려갔을 때 꺼져가는 원영의 생명을 살려낸 젊은 의사에게 말하지만 이내 후회했고 여자친구와는 자연스럽게 이별했고 자신 말고는 온통 노인밖에 없는 재활병원에서 대부분 수명이 세자리수밖에 남지 않은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지냈다. 이 병원 생활이 너무나도 사실감 넘쳐서 마치 내가 재활병원 생활이라도 해본 것 같았다.
 퇴원한 원영은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혼자 살기엔 너무 큰 집도 정리하고 혼자 지내는데 이미 부모님의 사망보험금과 유산으로도 살아가기에 충분했기에 학창시절 친구의 소개로 심부름센터에 취직해 딱 할만큼은 설렁설렁 일을 시작한다. 누군가의 남은 날을 아는 것은 생각보다 더 괴로운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빽넘버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원영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붐비는 곳을 피했다. 원영은 혼자 살면서 5년간의 병원생활로 아침밥이 익숙해진 탓에 우연히 알게 된 민지네식당에서 매일 아침을 먹고 동네 한적한 카페 샘에서 원두커피를 마시고 심부름센터 일을 하며 살아가고 종종 연애라는 것도 했지만 깊게 발전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원영은 그렇게 외롭게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카페 샘을 찾은 원영은 거의 손님이 없던 샘에 세 테이블이나 손님이 있어 의아해하며 들어가는데 문득 손님 중 한 커플의 등에서 점멸해가는 빨간색 1이라는 숫자를 보게 된다. 금방이라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1의 상태에 당황한 원영은 카페의 다른 손님과 카페주인의 등을 다급하게 보지만 그들의 수명은 아직 한참 남아있는 상태이다. 분명 이 곳에서 사고가 날 것 같다는 예감에 원영은 앞뒤 따질 수 없어 곧바로 그 커플에게 다가가고 당장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고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괜히 시비만 붙게 되고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한 남자가 혼잣말로 구시렁대며 나가버리자 문득 원영은 그 남자의 등에 숫자가 없다는 걸 인지하게 된다. 원영은 그 남자를 따라가지만 잡지는 못하고 다음 순간 자동차 한 대가 카페 샘에 돌진하면서 커플을 덮치는 사고가 일어난다. 누군가의 죽음의 순간을 인지했음에도 막지 못했다는 생각은 원영을 또 다른 감정으로 뒤덮는다.

 며칠 뒤 혼자 있던 원영의 집에 한 남자가 찾아오고 모르는 사람이기에 원영은 문을 열어주지 않지만 오래 걸리더라도 원영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문 앞에서 담배까지 피우는 남자를 본 원영은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가 남자의 등에 숫자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집에 들어온 남자는 자신을 박 부장이라고 소개하며 이 대리에게 원영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이 지역에 '보는 자'는 원영이 처음이라고 알려준다. 알고보니 이 대리는 며칠 전 카페에서 봤던 수명이 보이지 않는 그 남자였고 이 대리와 박 부장은 사신이었다. 명부에 적힌 사람들이 죽는 순간 곁을 지키다 그들을 사후 세계로 인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보는 자'란 원영처럼 삶의 남은 날짜를 볼 수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고 사신에게는 제법 걸리적 거리는 존재라는 것이 박 부장의 설명이었다. 박 부장은 원영에게 생사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며 무언가를 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라고 조언한 뒤 떠난다.

 얼마 후 우연히 사고 현장을 목격한 원영은 그 곳에서 이 대리를 마주하게 되고 사신들이 자신의 할당을 채우기 위해 죽음을 빗겨간 사람을 대신해 대체자를 명부에 넣는 일종의 꼼수를 쓰고 있다는 걸 듣게 된다. 그 날의 실적을 채우지 못해 다음 달에 죽을 사람을 당겨오게 되면 다음 달에 또 구멍이 생기기 때문에 아예 한참 남은 사람을 끌고 온다는 아주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초록빛으로 빛나는 긴 수명을 가진 사람도 대체자가 되면 한 순간에 점멸하는 빨간색 숫자 1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죽음을 피하게 되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메꿔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박 부장이 원영에게 인간의 생사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던 이유였다.

 원영은 민지네로 식사를 하러 갔다가 민지엄마 (민지네는 그저 간판을 안 바꿨을 뿐이었고 그 집 아들 이름은 용길이었다.)의 부탁으로 용길이가 다니는 태권도장에 김밥을 배달하러 가게 된다. 낡은 건물 5층에 자리잡은 태권도장에서 원영은 빨간 숫자 1을 등에 달고 있는 아이를 보게 된다. 분명 아직 한참 길게 수명이 남았던 용길이조차 갑자기 빨간 숫자 1로 바뀌는 걸 본 원영은 용길이가 대체자로 선정됐음을 알게 된다. 태권도장에 있는 여섯 명의 사람들이 앞으로 한 시간 안에 죽는다는 건 이 곳에서 무슨 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원영은 아랫층으로 달려가 다른 사람들의 등을 확인하지만 죽는 건 5층 사람들 뿐이다. 5층 사람들만 죽는다면 그것은 4층에서 일어날 화재나 폭발 밖에 없다고 판단한 원영은 옥상으로 달려가고 잠겨있는 옥상문 손잡이를 부수려는데 박 부장(이 대리었나...)이 나타난다. 박 부장은 저 아이들을 구하게 되면 대신 내일 근처 양로원에서 단체 식중독으로 노인 여섯명을 데려가야 한다고 말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던 원영은 손잡이를 부순다.

 용길이와 친구들은 살렸지만 다음 날 여지없이 노인들은 죽었고 이 일로 큰 죄책감에 사로잡힌 원영은 앓아눕게 된다. 몸살을 앓은 원영은 다시 이 대리를 마주하게 되고 그에게 뜻하지 않게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실 원영의 가족이 사고를 당했던 고속도로에서 죽어야 할 사람은 원영 부모님이 아니었다. 원래 죽을 두 사람 대신 대체자로 선정돼 죽게 된 것이었다. 원영은 그제서야 그 날 휴게소에서 봤던 젊은 커플의 남자가 왜 자꾸 여자친구에게 휴게소에서 쉬었다 가자고 했는지, 그 남자가 왜 화장실에서 나오는 엄마의 등을 뚫어져라 봤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남자 또한 '보는 자'였고 연인의 등에서 희미한 빨간 숫자 1을 보고 사고를 예감해 죽음을 피해갔던 것이다. 

 원영은 또 다른 '보는 자'인 그 남자를 만나야 겠다고 생각한다. 복수라던가 하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고 단지 만나서 자신의 등을 보여줘야 겠다는 생각은 했다. 원영은 전 여자친구에게 연락해 그 날 그 남자가 타고 있던 차 사진을 (여자친구의 로망인 차종이라 원영이 찍어서 보내줬었다.) 입수하고 심부름센터 사장님을 통해 그 당시 차 소유주를 알아낸다. 원영은 당장 버스 표를 끊고 간당간당하게 버스에 탑승해 그 남자가 살고 있는 지역으로 향한다. 버스가 한 번 휴게소에 멈췄을 때 버스에서 내린 원영은 자신이 탄 버스 승객들의 등이 모두 숫자 1로 빛나고 있음을 발견한다. 박 부장의 '잊지 마, 너의 선택이었어.'라는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원영은 결국 버스를 타지 않는다. 버스가 떠나기 직전, 타야할 버스를 놓친 한 승객이 원영의 버스에 탑승하고 그 사람의 등 숫자는 빨간 숫자 1로 변한다. 그 사람이 원영의 대체자가 된 것이다.

 원영은 그 길로 '보는 자'를 만나는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빽넘버를 모르는 것. 그것이 원영에게 주어진 유일한 축복인 것이다. 새로 사귄 여자친구 현주와 연애를 시작한 원영은 어느 날 골목에서 박 부장을 마주치지고 곧 누군가 이 골목에서 죽게 될 것을 예감하지만 관여하지 않고 스쳐 지나가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작가는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어머니 상을 겪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에 '모르는' 내가 괴로워서 '알고 있는' 원영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하지만 '알고 있는' 원영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정도였고 그 불가항력을 바라보며 글을 쓰는 동안 많이 치유됐다고 한다. 사실 책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난 이 짧은 작가의 말이 너무 와닿았다. 무엇이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였고 원동력이었는지, 그게 책의 내용보다 더 내 마음을 두드렸다.

 책에도 나왔다시피 인간에게 있어 가장 단호하게 정해져 있는 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루 하루를 충실하게 (물론 꼭 충실할 필요는 없다.) 살아낸다. 어차피 죽을 거지만 대충 살지는 않는다. 그건 아마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되는지를 미리 안다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물론 주인공 원영은 자신의 수명은 알 수 없었지만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어쩔 수 없이 이 생각을 하게 됐다. 사람들은 자신의 수명을 알게 되면 더 열심히 살까, 아니면 더 마구잡이로 살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왠지 상당수의 사람들은 후자일 것 같다. 그리고 언제 죽을지를 알게 되면 죽음의 공포는 배가 아니라 수천배로 크게 다가오지 않을까. 그런 걸 생각하면 역시 이건 저주일 수밖에 없겠다. 

 아니 근데 죽음을 피해가면 사신은 자신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을 데려간다는 것. 사실 이게 가장 큰 오류 아닌가. 애초에 사신들이 일만 제대로 했으면 대체자도 생기지 않을테고 다들 자신의 수명대로 살다가 갈텐데 그걸 못해내니까 자꾸 4, 5자릿수의 긴 수명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죽는 거 아닌가. 스토리 설정상 당연히 필요한 부분이었지만 그냥 읽다보니 좀 열받았다.

 소재도 참신하고 판타지적 요소의 활용법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문체였다. 담담하게 사고를 당한 한 청년의 삶을 기술하고 병원에서의 생활과 일상에서의 생활들을 자세하게 묘사한 것이 가장 좋았다. 갑자기 가족을 잃은 스무살 청년의 어투로 서술한 것이 인상에 깊었다.

 빽넘버에 대한 이야기보다 병원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와서 정작 주체가 되는 판타지적 이야기는 이게 다인가 싶어 다 읽었을 때 좀 짧은 감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면 여기서 딱 끊는 것이 나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오히려 작가가 말하려는 건 빽넘버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아니지 않았을까 싶었달까.

 흠... 줄거리 기록용으로 쓰는 거였는데 내가 또 주제넘게 평가를 하려고 했다. 어쨌든 이 책은 별 네 개. 탕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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