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 지니」
「진이, 지니」
정유정
★★★★☆
읽은 기간: 19.10.11~30 / 20일
정유정이라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입한 책이다. 내가 종의 기원이랑 7년의 밤에서 정유정님에게 너무 빠져버려서 판단력 따윈 있을 수 없게 됐달까... 그래놓고 28에서 살짝 실망했다고 하긴 했는데 뭐 사람이 어떻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겠어^^... 정유정님이 발표하는 작품마다 내 취향에 찰떡같이 맞게 쓸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사실 진이, 지니도 그다지 내 취향은 아니었다. 음 아무래도 내가 약간 장르에 대해서 보수적인 게 있나보다. 판타지 소설은 확실하게 판타지적으로- 소설은 확실하게 현실적으로- 이래야 할 거 같은데 소설인 줄 알고 펼쳤던 책에서 갑자기 진이가 지니의 속으로 들어가자 살짝 당황해서 진도가 안나갔다. 막판 스퍼트 올려서 만취해서도 읽고 하긴 했는데 거의 3주나 걸려서 읽었으니 정말 오래 걸리긴 했다.
영장류 연구원으로 살아가던 진이는 모시던 교수님을 따라 왐바 캠프에 가서 보노보를 처음 접하고 빠져들고 만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밤 혼자 길을 나섰다가 태풍을 만나고 급하게 뛰어들어간 킨샤사의 어느 기념품 가게에서 밀거래 중으로 보이는 보노보 한 마리를 만난다. 겁에 질려있는 아이를 보고 자신은 너의 친구라고 소개하며 가지고 있던 파인애플을 건넨 진이는 이 작은 야생 보노보를 구해줘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밀거래범들의 잔혹성을 알고 있던 터라 섣불리 용기를 내지 못하고 밀수범의 기척이 느껴지자 소녀 보노보를 그대로 둔 채 달아나버린다. 그 길로 한국으로 돌아온 진이는 머릿속에서 그 보노보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죄책감에 빠져 살다가 자신을 끝까지 붙잡고 있던 그 날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결국 자신의 직업을 정리하고 이제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부류의 공부를 준비하고 유학을 계획한다. 영장류 센터에서의 마지막 날, 다음 날이면 한국을 떠나야 되는 상황에서 진이가 대학생 때부터 돌봐온 침팬지 팬이 출산을 하게 되고 그 역사적인 장면을 참관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가 웬 전화 한 통을 받는다. 밀거래 동물들이 대거로 숨겨져있던 별장에 불이 났는데 그 중 침팬지 한 마리가 탈출해 119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으며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전화였다. 갈 수 있는 다른 사육사도 있었지만 교수는 진이를 지목했고 그 길로 진이와 교수는 침팬지를 구조하러 간다. 하지만 현장에 달려가서 보자 그건 침팬지가 아닌 보노보였고 뜻하지 않게 진이는 자신이 버린 보노보를 떠올리게 된다. 같은 보노보는 아니겠지만 진이는 그 때 그 보노보에게 했던 행동을 똑같이 하고 보노보는 무사히 구조된다. 그리고 교수와 함께 센터로 돌아가는 길 보노보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 히터를 틀 수 있는 앞자리로 옮겼다가 갑자기 도로에 노루가 뛰어들면서 차량이 전복되는 사고를 당한다.
나이 서른이 넘었지만 살아오면서 무엇을 이뤄본 적도 하고싶을 걸 가져본 적도 없는 청년 민주는 그런 자신을 천하의 한심한 놈으로 보는 아버지에 의해 한순간에 집에서 쫓겨난다. 이런 저런 곳에서 구르면서 연명하던 민주는 어느 날 음식 배달을 하는 심부름을 하다가 자신이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해병대 할아버지의 집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지만 무시하고 마지막으로 배달을 가는데 거기서 할아버지가 죽어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외면하지만 않았어도 살릴 수 있었을 생명이었다는 걸 알게 된 민주는 이제까지 그나마 잡고 있던 끈도 놓아버리고 어느새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공부하던 시절 알고 지내던 분에게 귀동냥으로 들었던 영장류 센터를 기억해내고 무작정 그 곳에 갔다가 침팬지들에게 너무나 다정한 그녀 진이를 처음 보게 된다. 그 날 밤 당장 갈 곳이 없던 민주는 근처 산 속 출입금지 지역으로 몰래 숨어들고 작은 정자에서 침낭을 펴고 잠자리에 든다. 그러다 어딘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걸 듣게 되는데 그것이 교통사고 소리였다는 걸 알게 되고 그 길로 119 신고를 하게 된다.
사실 여기까지가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었다. 뭘까... 대체 어떻게 진행되는거지? 하면서 어찌나 신나게 읽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의 내용은 다소 나를 당황시키게 만들었다. 사고로 의식을 잃은 진이의 몸은 병원으로 가지만 진이의 영혼은 몸 속에 있지 않았다. 바로 보노보 지니의 속에 함께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진이는 지니의 속에서 지니의 기억을 보며 자신이 외면했던 그 보노보가 바로 지니임을 알게 된다. 진이가 지니의 몸을 온전히 차지할 수 없었던 것은 두 영혼이 서로 뒤바뀌었기 때문이 아니고 보노보 지니의 몸 속에 둘 다 들어와 있었기 때문인데 때문에 정신이 진이였을 때 정자에서 민주와 마주친 진이는 자신이 인간임을 이해시키고 민주는 그게 자신이 어제 봤던 '다정한 그녀'임을 깨닫게 된다. 둘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래가 성립되고 진이를 돕기로 한 민주는 그녀를 배낭에 넣고 병원으로 향하지만 병원이 다 왔을 때 지니의 영혼이 돌아오면서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보노보 지니의 몸에 지니가 돌아왔을 때는 진이는 램프 속으로 들어가 지니의 과거를 엿보게 되는데 그 과거도 꽤 매력적이었다. 보노보에 대해 조금 알게 되는 계기도 됐고 인간이 얼마나 경멸할만한 존재인지도 확실히 느꼈다. 내용을 다 적기엔 좀 무리가 있으니 넘어가고 어쨌든 처음엔 돈 때문에 진이를 돕던 민주도 점점 인간 대 인간으로 친구 대 친구처럼 진이를 돕게 되고 어떻게든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병원으로 가려하던 진이는 어느 순간 자신이 지금 지니의 몸을 차지하고 있음을 자신이 이기적이었음을, 그리고 마침내 병원에서 어렵사리 자신의 육체를 마주했을 때 자신이 정말 죽어가고 있음을 그리고 마지막 램프가 닫히는 순간 진이의 몸은 정말 죽을 거라는 걸 알게 된다. 지니의 몸으로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진이는 그렇게 하지 않고 마지막을 준비하고 민주는 그녀의 결정을 기꺼이 따른다. 그 날은 진이의 생일이었고 날짜를 알고 있던 민주는 진이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준다. 이 장면에서 진이가 한 번도 친구라는 존재에게 이런 걸 느껴본 적 없다는 게, 그리고 서른 다섯밖에 안된 젊은 나이에 그 얼마 안되는 삶을 너무도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게 너무도 마음이 뭉클했다. 민주는 마지막 순간 진이의 곁을 지키는 단 한 사람이 되어주고 그녀의 유언대로 그녀를 떠나보낸다.
그로부터 3년 뒤 민주는 교수의 호출로 오랜만에 무곡마을을 찾게 된다. 교수는 이미 진이가 세상을 뜬 후 의식을 찾고 그 후 민주를 통해 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지만 죄책감으로 차마 민주에게 연락하지 못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니가 곧 왐바 캠프로 떠나는 날이 오게 되었고 그 모습을 민주가 보는 게 맞을 것 같다며 그를 부른 것이었다. 민주는 과연 지니가 자신을 알아볼까 하지만 진이가 했던 인사를 건네고 진이의 사원증을 걸어주자 눈빛을 빛낸다. 그렇게 민주는 지니 마저 보내준다.
늘 느끼는 거지만 이 엄청난 정보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물론 작가들이 작품을 들어가기 전에 취재도 많이 하고 관련 자료도 많이 찾아본다고는 하지만 이번에도 확실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보노보 라는 종에 대해 처음 알았는데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세상 귀여웠다. 귀여운 침팬지 느낌이랄까. 인간과 DNA가 98.7%인가 일치한다던데 그럼 거의 인간 아닌가...? 찾아본 이미지들만 봐서는 마치 사람 같았다.
요즘은 서평을 잘 읽어보는 편인데 (예전엔 귀찮아서 잘 안 읽었었다.) 거기서 이 책이 '선한 가해자의 트라우마'에서 시작되는 소설이라는 말이 있었다. 선한 가해자의 트라우마가 무엇이냐면 어떤 행동을 했어야 했는데 그 순간에 용기를 내지 못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 때, 그걸로 인해서 두고두고 죄책감 느끼고 후회하는 걸 말한다.
진이는 용기가 없어 지니를 처음 봤을 때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민주는 자신은 비록 몰랐지만 구할 수 있었던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선한 가해자의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하지만 결국 진이는 지니를 구조하고 몸을 돌려주고 그리고 왐바로 돌려보내주었고 민주 역시 이미 진이가 사고를 당했던 시점에 구조 신호를 무시하지 않음으로써 어느 정도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발걸음을 내딛었다고 본다. 트라우마 이후의 성장으로 그들은 조금씩 인간적인 성장을 한 게 아닐까 싶다. 사실 진이가 마지막에 죽을 거라고는 생각 안하고 읽어서 좀 당혹스러웠지만 그런 상황에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이겨냈다는 표현이 맞는진 모르겠다.) 죽음을 택한 그녀의 결정이 굉장히 용기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내가 인간이라 너무 인간 위주로만 책을 읽었는데 지니의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도 엄청난 서사가 있는 책이었다. 진이가 램프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보여준 지니의 인생사는 아직 어린 보노보 한 마리가 겪기엔 너무도 힘든 인생이었다. 잘 살고 있던 아이를 돈 때문에 인간에게 밀렵당했고 역시 돈 때문에 보노보 10마리 중 한 마리만 살아남는다는 긴 긴 여정을 겪어야 했으며 한국땅을 밟아서도 결국 그저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사육 당했다. 불이 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서커스 놀잇감으로 살다가 흥미가 떨어지면 그대로 버림받았겠지. 결국 인간에 의해 구조되고 인간에 의해 치료된 후 인간 덕에 자신이 있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게 됐지만 그녀의 상처도 아마 평생 치유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너무 좀...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동물의 입장까지 생각하게 하다니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내가 나라서 표현을 이렇게까지밖에 못하지만 아마 다른 독자들은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감명받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