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 재욱, 재훈」
「재인, 재욱, 재훈」
정세랑
★★★☆☆
읽은 기간: 21.12.10~12 / 3일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기력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근 두달은 책도 손에 안잡히고 그냥저냥 보냈던 것 같다. 새해가 되면서 새로 시작하자고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계획했던 일들은 단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고 (사실 의지가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당연하게도 미루고 미루고 미루던 책 리뷰는 더 미뤄지게 됐다. 그러다보니 이 책은 벌써 두달이나 지났네...
책과의 권태기를 끝내야 겠다고 생각한 게 바로 며칠 전이었고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생각보다 손쉽게 권태로움은 끝났다. 덕분에 써야할 리뷰가 네 개로 늘어났기에 급하게 다시 손을 놀리게 됐다. 물론 내 머리는 이 책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지만.
재인, 재욱, 재훈은 나이차가 꽤 나는 삼남매의 이름이다. 대구의 한 연구단지 연구원인 재인과 설계 계열에서 일하는 재욱, 그리고 아직 고등학생인 재훈은 그렇게 우애깊지도 그렇다고 데면데면하지도 않은 남매사이인데 재욱이 아랍으로 출장을 떠나기 전 형제끼리 마지막 여행을 다녀오던 길에 우연히 들른 칼국수집에서 칼국수를 먹은 후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재인은 손톱깎이로 깎이지 않을만큼 단단한 손톱이 자라기 시작했고 재욱은 설계가 잘못된 곳만 빨갛게 보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재욱이 시간을 두고 관찰해보니 그건 안전하지 않은 곳이 붉게 보이는 것이라는 걸 눈치챈다. 재훈은 엘레베이터를 자신 맘대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엄청난 능력은 아니지만 꽤 유용한 능력이긴 했다. 삼남매는 서로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기에 이게 세 사람이 동시에 관련된 일이라는 걸 알지 못한 채 이야기는 진행된다.
세 사람에게는 각기 다른 편지가 도착하는데 재인에게는 save 1, 재욱에게는 save 2, 재훈에게는 save 3이라고 적힌 편지였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재인이 편지의 주소로 찾아가보니 그곳은 남매들이 잠시 들렀던 칼국수집이 있던 주소였고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재인은 편지와 함께 온 손톱깎이로 새로 난 단단한 손톱을 깎아보는데 드디어 안 깎이던 손톱이 깎이기 시작하고 재인은 그 손톱을 자신이 일하는 연구소에서 분석한 뒤 아주 단단한 물체라는 걸 알아내고 손톱을 배양해 얇은 판막을 만들어 동료들의 가운에 넣어준다. 재인의 절친한 친구 경아는 전남친의 스토킹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재인은 자신의 손톱으로 인조 손톱을 만들어 그 안에 복숭아 액을 넣어서 경아의 손톱에 붙여준다. 부디 그 손톱을 쓸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경아의 전남친은 어김없이 나타났고 복숭아 알러지가 심한 남자에게 재인의 손톱이 무기가 돼 경아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
삼남매에게는 바람끼가 심한 아버지가 있었는데, 엄마는 남편에게 받은 분노를 자식들에게 폭언으로 풀곤 해서 삼남매는 아버지를 싫어했다. 다행히 정상적으로 자랐지만 재인은 연애에 비관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고 어느 날 아버지가 다시 집에 와서 살게 되었다는 엄마의 연락을 받자 다시 한번 환멸을 느낀다. 하지만 집에 갔던 날 재인은 그 강한 손톱 덕분에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엄마를 구할 수 있게 된다.
재욱은 편지가 담긴 소포에서 레이저 포인터를 받았다. 아랍의 넓디 넓은 사막에서 밤이 되면 할 일이 없었던 재욱은 레이저를 하늘에 쏘곤 했는데 어김없이 레이저로 장난을 치고 있던 어느 날 사막 저 멀리에 붉은 빛이 아른거리는 것을 보게 된다. 뭔가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 재욱은 무작정 그곳으로 달려가고 그곳에서 교복을 입은 두 소녀를 발견한다. 소녀들은 인신매매단에게서 도망나온 아이들이었는데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두려움에 떨고있는 소녀들을 재욱은 몰래 회사 숙소로 데리고 들어왔고 회사에 말할까 고민하지만 그렇게 되면 소녀들을 책임지고 싶지 않은 사측에선 아이들을 떠넘겨 다시 위험에 처할게 분명하므로 자신이 직접 안전한 곳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재욱은 포커로 상사에게 휴가권을 얻고 작업장에서 친해진 외국인 노동자 산제이와 함께 소녀들을 몰래 차에 태워 수도로 옮긴 뒤 한국에 있는 여자친구가 알아봐준대로 유엔 난민기구가 있는 제네바로 보내준다.
재훈은 교환학생으로 1년간 조지아의 염소농장으로 보내진다. 너무나도 시골에 상상했던 생활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지내고 있던 재훈은 소포로 받은 열쇠가 무슨 의민지 몰랐지만 일단 지니고 다닌다.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고 생각보다 잘 적응해나가던 어느 날 환각에 빠진 사람들이 총을 들고 학교를 급습하는 일이 벌어지고 학생들이 위험에 처하는데 조지아의 시골로 떠난 뒤 엘레베이터를 소환하는 초능력을 쓸 일이 없었던 재훈은 오랜만에 능력을 발휘해 방공호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가동하고 열리지 않는 문을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열쇠로 열어 세명의 소중한 친구들의 목숨을 구해낸다.
삼남매의 능력은 크게 대단한 초능력은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소소한 능력이지만 그 능력으로 각각 한명, 두명, 세명의 목숨을 구해낸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그러니까 일상에서 접한다는 게 아니라 영화나 책에서'만' 접하는 히어로들은 늘 엄청난 초능력을 갖고있고 많은 사람들을 돕고 구한다. 하지만 이 책 속의 삼남매는 아주 소소한 능력으로 몇 사람의 목숨만을 구했을 뿐이다. 그게 보잘 것 없다는 게 아니라 그게 오히려 대단하다. 일상에서, 어딘가에서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물론 말도 안되지만. 만화나 영화 속의 말도 안되는 위험이 아니라 현실에 있을 법한 데이트 폭력, 테러 위험, 인신매매에서 살짝만 나사 나간 것 같은 초능력으로 구해지는 사람들이라. 나름 신박했다.
다른 것보다도 나는 그냥 이 책에서 공감가는 문장들이 몇 개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삼남매는 같은 부모 아래에서 자랐지만 삶을 대하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폭언을 일삼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쏟아붓는 엄마 아래에서 같이 자랐지만 재인은 자신이 엄마와 같은 성정이 있을까봐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고 재욱은 개폐식 귀를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 것들이 묘하게 공감이 됐다. 난 비교적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에서 평화롭게 자랐는데 왜 이런 게 공감이 되는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