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일대의 거래」

셍셍칩 2019. 12. 6. 20:29

「일생일대의 거래」

프레드릭 배크만

★★★★☆

읽은 기간: 19.12.05~06 / 2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하나인 프레드릭 배크만. 모든 작품이 다 마음에 쏙 들었던 건 아니지만 대부분 좋았기에 신간 뜨자마자 바로 클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 막상 받아봤을 때 이제까지와 다르게 과하게 얇은 두께에 살짝 당황했다. 그리고 펼쳐서 그 넓은 여백과 한 장에 몇 자 안 적힌 페이지를 마주했을 땐 살짝 의아했고 모든 페이지가 다 그렇다는 걸 깨달았을 땐 살짝 실망할 뻔 했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선 역시 잘 골랐다 싶었다.
 초입엔 약간 집중이 안됐다. 이해가 안되면 집중을 못하는 성격이라 아리송한 것이 이게 무슨 내용이람? 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집중력이 바닥을 쳐서 그냥 어거지로 끌고 가는 느낌으로 읽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용이 이해가기 시작했고 그후로는 뭐... 아주 순식간이었다. 애초에 워낙 간결한 문장에 짧은 책이라 오래 걸릴 것도 없었지만. 내용은 사실 별 거 없다. 등장인물도 굉장히 소박하고 줄거리도 간단. 하지만 느끼는 건 음... 많았다는 표현은 좀 아닌 거 같고 깊었다 라고 해야 할까.
 주인공 '나'와 사신(이라 부르면 싫어하겠지만 딱히 부를 말이 없으므로), 암에 걸린 꼬마아이, 아이의 엄마, '나'의 아내와 아들이 전부인 이야기는 당연히 '나'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진짜 짧게 요약하면 그냥 가족과 제대로 보내지 못한 인생을 후회하는 암에 걸린 남자가 병원에서 알게 된 또 다른 암에 걸린 어린 소녀에게 사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소녀 대신 삶을 포기하면서 마지막으로 가족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 내용이다. 도입부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하면서 시작되는데, 마지막 장에서 알게 된다. 아버지가 누구를 죽였는지.
 일생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만 살아온 남자는 45년의 세월동안 많은 것을 이루었고 소위 말하는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 정확하게 나오진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재력도 어마어마 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 예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암이라는 병에 걸렸는데 남들이 잘 걸리지 않는 희귀암에 걸렸다는 걸 알고 나는 병에서 마저도 남들과는 다르구나 라고 안도할만큼 그는 자존감이 높고 특이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이룬 것이 반비례하게 그가 이루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단란한 가정이었다. 아내는 그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고 그런 아내를 닮은 아들 또한 그가 바라는 강한 사람이 아닌 다정한 사람으로 성장했기에 그는 결국 가족과 융화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이룬 것과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왔다. 암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 후 남자는 매일 아들이 바텐더로 일하는 가게를 멀리서 지켜보며 아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스물다섯의 아들은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남자는 암병동에서 암에 걸린 어린 소녀를 알게 되는데 소녀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엄마와 주변 어른들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하루종일 크레파스로 의자를 색칠한다. 병에 걸린 소녀는 그런 짓을 해도 꾸중을 듣지 않으니까. 남자와 소녀는 암병동에서 폴더를 들고 다니는 회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를 자주 마주하는데 그녀가 누구인지 그들은 알고 있다. 남자는 어린 시절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을 때도, 부모님을 잃었을 때도 그녀를 봤다. 그래서 남자는 그녀를 사신이라 부른다. 다시 그녀를 마주했을 때 남자는 당신이 사신인 걸 안다며 나를 데려가러 온 거냐 하지만 여자는 자신은 사신이 아니며 그저 정해진 일을 수행할 뿐이라고 한다. 아직 남자에겐 살 날이 아주 많이 남았으며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이루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남자의 소중한 사람들을 데려가기 위해 남자의 인생에 그렇게 자주 등장한 것이 아니라 남자를 지키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남자가 태어나던 순간 남자의 쌍둥이 동생을 데리러 왔다가 남자와 눈이 마주쳐버렸고 그 때부터 남자는 사신의 아끼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녀의 병실로 향한다. 사신이 소녀를 데리러 왔다는 걸 깨달은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사신의 폴더를 빼앗아 달아나고 곧장 차를 몰아 돌진하는 트럭에 부딪힌다. 차에 깔린 채 남자는 자신을 쫓아온 사신에게 소녀 대신 자신을 죽이라고 말하고 사신은 죽음은 죽음으로 대신할 수 없다고 한다. 가능한 것은 오직 목숨을 목숨으로 대신하는 것 뿐. 그 말인 즉슨 소녀 대신 죽는 건 불가능하지만 소녀를 살리기 위해 남자가 '사라지는' 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소녀가 살아갈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남자의 삶이 통째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자는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게 되는 것이고 아들의 아버지는 다른 인물로, 남자가 살면서 이룬 것들 또한 다른 인물이 이룬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사신은 남자의 결심을 확인하기 위해 남자를 아들이 일하는 술집으로 데려간다. 바텐더인 아들은 아버지와 회색옷을 입은 여자를 맞이하고 아주 오랜만에 부자는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확실하게 사신의 제안을 (제안이라고 하는 게 맞나 싶지만) 받아들인다. 아들을 사랑했다는 말고 함께. 향년 45세, 아니 향년이라는 말이 맞는걸까. 그는 죽은 게 아닌데. 사라진건데. 어쨌든 그는 자신의 의지로 자기 자신을 그렇게 사라지게 했다. 아직 살 날이 많고 창창한 한 어린 소녀에게 목숨의 공간을 주기 위해.
 성공한 삶이란 무엇일까. 돈이 많은 것?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진 것? 명예를 얻은 것? 그렇다면 저런 것이 있으면 행복할 수 있는 걸까? 바꿔 말해서 행복하려면 저런 것들이 꼭 필요할까? 돈이 꼭 행복을 결정하는 건 아니지만 행복하지 않다면 내 지갑 사정을 확인해보라는 말이 있다. 아주 공감하는 말인데 돈이 없으면 불행해질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돈이 행복의 절대조건이 될 수는 없다는 말 같다.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행복하려면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야 할까. 돈과 지위, 명예를 얻기 위해 남자는 가장 가까이에서 자신을 아낌없이 사랑하고 조력해줄 가족을 항상 뒷전에 둔 채 살아왔고 그로 인해 뒤늦게 후회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정말 가치있게 대해줘야 하는 게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처음에 알쏭달쏭 헷갈리게 만드는 게 프레드릭 배크만의 매력인데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그 느낌을 받았다. 설명이 덜 된 채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 느낌은 뒤로 가면서 베일이 벗겨짐과 함께 감동으로 바뀐다. 무심한 듯 간결한 말투로 담담하게 이어가는 문장 또한 남자의 분위기를 잘 느끼게 해줬다. 말투는 냉정한데 속 이야기는 어찌나 따뜻한지... 이렇게 짧은 이야기로 사람을 울컥하게 하다니. 프레드릭 배크만... 당신이란 남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프레드릭 배크만 작품 중에선 아직은 오베라는 남자를 넘어서는 건 못 읽었다. 그럼에도 다른 작품들로 실망을 시키지 않다니 정말 대단해!



네가 태어났을 때 어떤 사태가 벌어졌지. 네가 귀청이 떨어져라 울던 바로 그 순간, 난생처음으로 그 사태가 벌어졌다. 다른 누군가 때문에 가슴이 아파졌다. 나는 내게 그 정도로 영향을 미치는 사람 옆에는 머무를 수가 없었다.

아이의 관심은 절대 되찾을 수 없어.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시기, 그 시기가 지나면. 그 시기가 맨 먼저 지나가 버리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