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행 관람차」
「야행 관람차」
미나토 가나에
★★★★☆
읽은 기간: 18.12.24~27 / 4일
이건 진짜 오랜만에 사서 읽은 책이다. 재미 없을지도 모를, 내 취향이 아닐지도 모를 책을 돈을 주고 사서 읽고 짐덩이로 전락시키는 것 보다는 빌려읽는 게 아무래도 나아서 최근엔 계속 빌려 읽었었는데 이게 가끔 휴무 때문에 도서관에 못가거나 주말이라 도서관이 닫거나 해서 읽던 책을 다 읽으면 중간에 며칠이 뜨는 경우가 생겨서 그 때를 대비할 여분의 책 한 두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가끔 잠실에서 알라딘을 지나치게 되면 괜히 기웃거리게 됐는데 이 책은 그러던 중 미나토 가나에 책이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산 책이다. 미나토 가나에가 아마 작은 등장인물까지도 프로필을 만들어 놓는댔나?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용이 더 세세하고 풍부할 수밖에 없다고. 인물묘사가, 심리묘사가 그래서 볼 만 하다.
이 책에는 세 가족이 등장한다. 한 가족은 가족이라고 하기엔 한 명 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어쨌든. 나 진짜 일본 이름 잘 못 기억하는데 이 사람은 기억난다. 고지마 사토코. 주변에 있었다면 딱 질색이었을 본인이 맞다고 생각하는 우월주의에 빠져있는 재수없는 아줌마. 그리고 히스테릭한 삐뚤어진 사춘기 소녀가 살고 있는 엔도 가족과 의사 아버지와 아름다운 어머니, 명문의대에 다니는 큰아들과 역시 명문학교에 다니는 딸과 막내아들로 구성된 완벽한 듯 보이는 다카하시 가족.
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는 언덕길 위에 위치한 고급 주택가 히바리가오카. 이 곳을 주 무대로 세 가족이, 가족 구성원들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면서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고급 주택가 답게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살던 히바리가오카에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우겨입듯 엔도 가족이 들어온 건 몇 년 전. 얌전하던 딸 아야카가 갑자기 부모를 당신이라고 부르며 히스테리를 부린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보다 마유미가 아야카를 혼내지 않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더라...유독 집에 집착하는 마유미는 기회가 생기자마자 히바리가오카에 작은 땅덩어리를 사서 집을 지어 이사를 온다. 그 자체만으로 일생일대의 바람이 이루어진 기분이다. 마유미는 히바리가오카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명문 여학교에 딸 아야카가 진학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아야카에게 제안을 하지만 아야카는 진학에 실패해 언덕 아래에 있는 공립학교에 다니게 된다. 언덕길병. 아야카는 자신의 병을 이렇게 이름 짓는다. 앞집에 사는 동갑내기의 잘생긴 신지를 몰래 짝사랑하면서 자신의 못난 처지 때문에 말도 잘 못 걸고 그냥 신지와 닮은 아이돌 순스케의 팬이 되는 걸로 그 마음을 대신 한다. 공부는 좀 하지만 운동을 못해 학교에서 하위그룹인 아야카는 상위그룹인 동급생에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끽 소리도 못하는 소위 말하는 전형적인 소심한 학생인 것처럼 보이지만 집에만 오면 안하무인 상전이 따로 없다. 엄마를 당신이라 부르며 지 하고싶은 건 다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 집어던지는 등 아직 내 주변에선 본 적 없지만 가끔 티비에나 나올 법한 사춘기 문제아다. 무슨 짓을 해도 져주는 엄마와 모든 걸 방관으로 일관하는 아빠 사이에서 그야말로 집안의 왕인 아야카는 환경탓도 있겠지만 그냥 본래의 인성이 쓰레기인 걸로...덕분에 아야카네 가족이 나올 때마다 얼마나 짜증이 났던지. 짜증이 이 책의 키포인트다.
다카하시 가족에서는 주로 둘째딸인 히나코가 많이 나왔다. 아빠의 전처가 죽으면서 의사인 아빠와 재혼하게 된 아름다운 엄마에게서 난 엄마와 아빠의 좋은 점을 적절하게 물려받은 딸 히나코. 엄마가 다른 오빠가 한 명 있지만 그런 건 상관없이 친오빠처럼 자랐다. 뭐 실제로 아빠가 같으니 친오빠인 건 맞지만. 그리고 아름다운 엄마 준코를 빼닮아 잘생긴 동생 신지까지. 겉보기에 완벽한 가족처럼 보이고 히나코도 그런 줄 알고 살아왔다. 신지가 모의고사 준비를 위해 히나코를 친구 집에서 자라고 보낸 그 날 밤 엄마 준코가 아빠를 살해한 존속살인사건에 휘말리기 전까진. 친구집에서 연락받은 아빠의 사망 소식. 준코는 자신의 짓이라며 경찰에 자수했고 동생 신지는 때마침 편의점에 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정황상 신지가 아빠를 죽였고 엄마는 신지를 감싸기 위해 죄를 뒤집어 쓴 게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하는 히나코지만 아직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다. 대체 그 날 밤 집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사카의 의대를 다니고 있는 자취하는 오빠에게 급하게 연락을 하지만 연락도 잘 되지 않는다. 오빠는 아빠가 죽었단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한걸까. 알고보니 준코는 이미 죽고 없는 남편의 전처와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걸로 남매는 추정한다. 이미 죽은 여자와 경쟁이라니 정말 의미 없지 않은가. 전처가 낳은 큰 아들은 남편처럼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에 진학했는데 내 아들 신지도 그래야 한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히나코와 신지 모두 명문 학교에 들어갔지만 거기서 만족하지 못한 준코는 신지를 압박한다.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지면 신지가 좋아하는 운동을 못하게 하면서. 하지만 신지는 알고 있었다. 이게 자신의 한계라는 것을. 그리고 그 날 밤 신지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히스테리를 부리고 만다. 앞집의 아야카를 그렇게 증오했는데 내가 똑같은 행동을 하다니. 집에 있던 아빠가 이를 말리러 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부끼리 대화를 하는데 다카하시씨가 말한다. 신지는 얼굴도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똑똑하니 아이돌을 시키는 건 어떻겠냐고. 신지는 이 정도면 됐다고. 다카하시씨 딴에는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 말이 준코의 머리에 어떤 곳을 건드린 걸까. 그렇게 준코는 남편의 머리를 내리치고 곧장 신고를 하지만 남편은 병원에 도착해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고 만다. 신고하기 전 준코는 신지를 이 사건에 개입시키지 않기 위해 돈을 주며 편의점에 다녀오게 하는데 일부러 돈을 주머니에 넣어주는 척 하고 넣지 않는다. 아마도 편의점에서 돈이 없는 걸 알게 되면 편의점 알바의 기억에 더 잘 남을테니까. 신지는 우연히 만난 앞집의 마유미 아줌마에게 돈을 빌리지만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서있는 경찰차를 보고 당황해 도망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으니 아야카의 아빠 게이스케. 그리고 히바리가오카를 사랑해 마지않는 고지마 사토코. 게이스케는 관심없으니까 됐고 고지마 사토코 이 아줌마가 어찌보면 아야카보다 짜증나는 캐릭터다. 꼴보기 싫어서 설명하기도 싫네. 그냥 남일에 관심 많은 아줌마 캐릭턴데 이 사람 시점으로는 아들내외와의 통화로만 보여진다. 본인은 남탓만 하는 것 같지만 딱 봐도 아들 내외가 사토코를 피하는 게 느껴지는 것이 약간 전형적인 아들 사랑 한국 시어머니 느낌이 물씬 난다. 일본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
이야기는 분명 살인사건이 터지면서 시작되지만 결코 살인사건이 주가 아니다. 다른 범죄소설처럼 알고보니 범인은 따로 있었다느니 하는 반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족 소설로서 가슴 따뜻한 감동을 선사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가슴이 뻥 뚫리는 결말도 제공하지도 않는다. 근데 재미있고 더 현실적이다. 있음직한 이야기로, 있음직한 결말으로 어느 정도는 마음을 불편하게, 또 아이러니하게도 편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소설이었다.
갑자기 끝에 엔도 가족이 갑자기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따듯하게 안아주고 갈등을 해소하는 장면이 나왔으면 오히려 거부감이 생겼을텐데 다행히 그러지 않았다. 고지마 사코토의 마지막 통화 내용으로 유추해보자면 아야카가 그 전처럼 히스테리를 부리진 않는 것 같았는데 딱 그 정도가 현실적인 결말이 아닐까. 이게 내 마음을 참 편하게 만들어줬다. 마지막 기사에서 다카하시 남매는 이미 죽은 아버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면서 어머니에 대한 죄를 가볍게 하기 위해 위증을 하는데 이것도 이상적인 결말은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결말 아닐까. 미나토 가나에 다운 흡입력을 보여준 책이다. 처음 미나토 가나에를 접한 고백만큼의 임팩트는 없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더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