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김신회
★★★☆☆
읽은 기간: 20.07.18~29 / 12일
보노보노가 조개를 안고 바다 위에 둥둥 떠있는 장면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다. 그 그림만 보면 뭔가 마음에 안정이 찾아온달까.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걱정 없이 그저 평화롭게 아니 평화롭다는 것도 망각할 정도로 잔잔하게 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휴대폰에 저장해놓기도 하고 가끔 들여다보기도 한다.
어릴 때 봤던 보노보노 만화영화에서 어딘지 맹하고 걱정 많은 보노보노와 그 옆에 착 달라붙어있는 포로리, 매일 친구들을 괴롭히며 화만 내는 너부리는 봤었지만 그 세 주인공의 존재 말고는 다른 등장인물도 특별한 에피소드도 기억이 나지 않을만큼 큰 관심도 임팩트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보노보노에 대해서는 그냥 캐릭터 자체만 좋아했지 만화에 대한 애정은 딱히 없었다. 그래서 처음 이 책 제목을 접했을 땐 곰돌이 푸우 같이 요새 유행하는 딱 그런 서적이구나- 하는 생각 뿐 감흥 없이 넘겼던 것 같다.
최근에는 심적으로 힘든 일이 많았다. 올 초부터 시작한 새로운 업무는 항상 나를 누르는 느낌이었고 (사실 업무의 강도보다는 사람이 너무 힘들었다.) 그게 현재까지 계속되는 중 또 다른 사건으로 쿠크같은 내 멘탈이 파사삭 부서졌다. 업무야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 사건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정확하게 언제가 돼야 끝날지는 잘 모르겠는 상황이다. 아마도 앞으로 한 달 안에는 끝나지 않을까 싶지만 확실하지도 않다. 사건 이후 하나하나가 고민의 연속이었고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구나 싶어 행동으로 옮긴 지금에 와서도 내가 지금 헛된 싸움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금도 불쑥불쑥 들어 마음이 안정이 될 시간이 별로 없다.
이 책에 나와있는 포로리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어제의 짜증나는 일을 잊지 않은 채 오늘을 살면 자신이 점점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맞다. 사실 힘들고 짜증났던 일은 잊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었다. 가끔 어떤 싫은 사람이 나의 신경을 건드리거나 스트레스를 줘서 열받고 분노가 치밀어도 저런 사람 때문에 내 기분을 망칠 순 없어, 저 인간이 뭐라고 내 마음에 상처를 내, 라는 어찌보면 자기 합리화를 하며 그 일을 넘기곤 했다. 물론 마음이 그리 너그럽진 않아서 그 사람에 대한 욕을 주변에 열심히 뿌리며 털어냈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만.
그런데 이 일은 아니었다. 열 받아서 울고 분해서 울고 친한 사람에게 하소연 하듯 이야기하다가도 또 빡쳐서 울고 그냥 그렇게 지나갈 줄 알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원래 극단적 이기주의로 억울하면 우는 성격이지만 타인이 나를 이렇게 울린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씩씩 거리며 울면서도 곧 괜찮아지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며칠 후에도 감정은 똑같았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 때 깨달았다. 계속 생각하고 이야기해서 소진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게 되는 분노라면 해결을 봐야겠다고. 그렇다고 내가 바로 뭔가를 한 건 아니고 심지어 타의로 인해 사건이 이어지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힘든 기간에 책까지 암울한 걸 고르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고른 게 이 책이었다. 특히 바로 전에 읽은 「시녀 이야기」가 가히 충격적이었기에 그런 건 절대 피해야겠다 하면서 페이지를 넘기다가 간결하고 귀여운 보노보노 일러스트와 어딘지 모르게 치유적 향기를 풍기는 제목에 별 고민없이 클릭했다.
줄거리는 뭐... 크게 설명할만한 게 없다. 보노보노와 연결해서 쓴 작가의 에세이였다. 작가의 이야기 반, 보노보노 이야기 반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적당한 공감과 적당한 감명을 받았다. 예상보다 오랜 기간 읽긴 했지만 내용 자체는 무겁지 않게 읽을 수 있었고 어느 부분은 내 조잡한 생각과 복잡한 감정들을 대변해줘서 후련하기도 했다. 언제나 곤란해질까봐 곤란한 보노보노의 귀여움에 치였고 중간중간 툭 치고 들어오는 공감가는 문장들에 안정을 느꼈다.
이렇게 끝내기 좀 아쉬우니까 좋았던 문장 하나 더 추가해야지. 이런 대사가 나온다. "기분하고 진실은 다르잖아. 네가 느끼는 기분이 네 진실은 아니야. 진실은 따로 있는데 우리는 늘 기분으로 모든 일을 판단하잖아. 그러면 더 힘들어져. 그 기분은 네가 아니야. 네가 가진 진실이 너지." 사실 살면서 얼마나 기분에 취해 살았던가. 기분파 인간들을 보며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 늘 다짐했지만 정작 나 또한 실천하지 못하고 살아온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다. 기분은 진실이 아니다. 무언가를 판단할 때 기분으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 어린이들이 보는 만화영화에도 나오는 대사인데 왜 이렇게 나한테 적용하는 게 힘든건지 모르겠다. 내가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쁜거지- 이거 내가 자주 하는 말인데 어른스럽지 않은 말은 맞다. 하지만 기분 나쁘니까 기분 나쁜데 어떡해...? 대신 그 감정이 행동으로 표출돼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 그래도 잘 억누르고 살고 있는데? (막 쓰다보니 하고 싶은 말이 뭔지도 모르겠네.)
눈에 띄게 화목하거나 특별히 단란하진 않아도 늘 굳건하게 그 자리에 있는 가족들과 몇 년간 큰 위기 한 번 없이 평탄했던 연애, 살짝 협소하긴 하지만 비교적 평범한 인간관계는 크게 티나진 않아도 나를 잡아주는 원동력이었는데 이번에 한 번 더 느꼈다. 난 그래도 기댈 곳이 많은 사람이구나,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꽤 풍족한 사람이었구나. 어쩌다보니 도서 리뷰가 아니라 일기가 되어버렸다. 다이어리는 손으로 써야해서 길게 못 쓰는데 오랜만에 내 얘기 길게 썼다. 마음이 살짝 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