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레몬」
권여선
★★☆☆☆
읽은 기간: 21.07.22~29 / 8일

마음이 따듯해졌으니 다시 주종목으로 돌아가볼까 싶어서 고른 미스터리 책이었는데 받아보니 생각보다 너무 얇았고 책장을 펼쳤을 땐 글자도 크고 여백도 넓어서 좀 놀랐다. 그런 거 치곤 좀 오래 읽었네... 집중력 부족이야, 집중력 부족. 내용은 크게 별 거 없었어서 리뷰가 길어질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미루다가 오래 걸리려나? 내용은 별 거 없었지만 또 그 내면은 의외로 깊은 느낌? 근데 그게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와닿지 않아서 별점은 많이 못줬다.
2002년 월드컵, 그 온 나라가 떠들석하고 북적이던 시기에 한 미모의 여고생이 살해당한 채 발견되면서 시작되는 사건은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한 채 끝이 나는데 이야기는 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시점으로, 각기 다른 시기에 화자가 되어 서술한다.
누구나 한 번 보면 다시는 잊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의 해언은 2002년 6월 30일, 공원에서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채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처음에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해언이 죽은 당일 해언을 누나가 새로 뽑은 차에 태우고 가는 게 목격되었던 학교의 모범생이자 부잣집 아들 신정준이었지만 정준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었기에 빠르게 누명을 벗는다. 정준은 해언과 헤어진 직후 갔다는 술자리의 많은 증인들로 인해 알리바이가 증명됐고 때문에 학교에선 고등학생 신분으로 술집에 간 그에게 정학을 내렸지만 정준의 집안에선 그를 곧바로 자퇴시키고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버린다.
그 다음으로 지목된 용의자는 해언이 정준의 차에서 나시에 반바지 차림으로 타고 있었다는 걸 목격했다고 증언한 목격자 한만우였다. 만우 또한 정준과 해언과 같은 학교 같은 학년 학생이었는데 경찰은 만우가 아르바이트 하느라 타고 있던 오토바이에서 해언이 반바지를 입은 게 보였을리가 없다는 것에 주목해 그를 범인으로 몰아가려 했는데 만우 또한 증거 부족으로 풀려난다.
해언의 죽음 직후 해언과는 정 반대의 외모에 해언과 달리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유쾌했던, 늘 어딘가 맹한 해언을 엄마처럼 챙기던 두 살 어린 동생 다언은 곧바로 전학을 가버린다. 해언과 태림, 정준과 같은 반이었던 상희는 다언과 시문학 동아리에서 만난 선후배 사이였는데 그로부터 몇년 후 대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다언과 마주치게 된다. 다언은 몇년 사이 아주 많이 달라져있었다. 그 사이 얼마나 성형을 많이 했으면 얼굴은 이물감으로 가득했으며 몸은 뾰족하게 느껴질만큼 말라있었고 당당당당 하고 웃던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얼굴은 무표정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상희는 다언을 알아봤고 찡그리듯 웃는 다언은 상희에게 연락처를 묻는다. 상희가 느끼기에 다언의 현재 얼굴은 마치 한껏 늙어버린 해언을 억지로 복원시킨 듯한 모습이었다.
사실 다언과 다언의 엄마는 해언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남들은 해언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잘 못보고 있었지만 다언과 엄마는 알고 있었다. 해언이 얼마나 아무 생각없이 사는 사람인지를. 해언은 말 그대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마치 짐승처럼 자신의 욕구만 채우면 되는 사람이었고 그게 충족되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다언이 가장 자주 보던 언니의 모습은 집에서 입는 편한 원피스 차림으로 속옷도 입지 않고 다리를 올린 채 살짝 벌리고 멍하니 소파에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엄마는 해언이 자라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속옷조차 챙겨입지 않고 등교를 하는 것을 발견하자 화를 내며 딸의 뺨을 내리치지만 그 순간 다언은 해언을 보는 엄마의 눈빛에서 엄청난 자부심을 보고 만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이가 나의 딸이라니, 이렇게 아름다운 생명체가 내 자식이라니, 라는. 그리고 엄마는 그 날부터 다언에게 해언이 등교하기 전에 속옷을 잘 챙겨입었는지 확인하는 일을 맡긴다.
그랬던 해언이었기에 다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언니가 그 날 신정준의 차에 타고 있었는지. 그리고 왜 공원에서 그런 모습으로 발견된건지. 해언은 절대 자신이 원하지 않고서는 남의 차에 탈 사람이 아니었다. 그 날 다언은 언니가 집에 없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언니는 그 날 왜 노란 원피스를 입고 나가 그런 식으로 죽게 된걸까.
그리고 다언은 자신이 언니를 정말 사랑했었는지 지금 와서 증명할 수가 없음에 혼란스러웠다. 그랬기에 도망치듯 살던 동네를 벗어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갔고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다언은 언니와 비슷해지기 위해 언니처럼 성형을 하기 시작했고 돈에 집착하는 성격의 엄마는 의외로 순순히 다언의 성형수술비를 대주었다.
해언이 죽은 뒤 엄마는 해언의 이름에 집착했다. 해언이 태어났을 때 원래 지어주려던 이름은 혜은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출생신고가 늦게 되면서 경상도 사람이었던 남편이 혜은을 해언으로 발음하자 그냥 딸의 이름을 해언으로 짓기로 했고 그렇게 해언은 해언, 둘째로 태어난 다언은 다언이 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눈부신 미모를 자랑했던 큰 딸을 지나치게 이뻐하던 아빠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해언이 죽기 한참 전 해언과 다언이 어렸을 적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기에 사랑해 마지않았던 딸의 죽음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엄마는 해언이 혜은이었다면 이렇게 허망하게 가지는 않았을 거라며 죽은 해언의 이름을 혜은으로 개명하려 했지만 사망자의 개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되자 개인적으로 집안의 모든 해언의 물건에 적힌 해언의 이름을 혜은으로 바꿔버렸다.
이렇게 계속 살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언은 사건의 진실을 알아야했고 언니를 죽인 범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유력한 범인인 한만우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사건이 일어난지 몇 년이나 지난 뒤 갑작스럽게 현관문을 두드린 다언을 만우는 의외로 쉽게 집안으로 들인다. 만우는 살인자로 몰렸던 소문의 주인공이 된 이후 학교를 자퇴했고 성인이 되어 군에 입대했다가 무릎에 육종이 생겨 다리를 절단한 상태였다. 다언은 그런 만우의 모습을 보고 벌을 받았다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집에 드나들면서 만우와 만우의 여동생 선우와 자주 시간을 보내게 되고 만우가 언니를 죽인 범인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된다.
해언은 죽던 날 해언은 노란 나시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만우는 끝까지 해언이 나시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고 말했었는데 사실 만우는 그 날 해언을 보지 못했고 그저 갑자기 나타나 다급하게 자신을 태워달라던 짝사랑하는 여학생인 태림의 요구에 응했다가 태림이 정준의 차에 타고 있는 해언을 보고 중얼거린 "나시에 반바지를 입었네." 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증언한 것 뿐이었다. 그랬기에 만우는 지금도 해언이 반바지를 입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고 그게 태림의 증언 때문이라는 걸 알았을 때 다언은 자연스럽게 정준의 차 보조석에 마치 집에서처럼 무방비한 상태로 다리를 올린 채 벌리고 앉아있는 언니의 모습을 상상하게 됐다. 태림은 바깥에서 차창을 통해 보인 해언의 자세로 해언의 옷차림을 추측했던 것이고 만우는 그저 짝사랑하던 태림이 시키는대로 증언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만우는 범인이 아니었다. 동생이 좋아하는 꽈배기를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 하던 치킨집에서 조금 일찍 나와 빵을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고등학생이 해언의 머리를 내려쳤을리가 없었다.
태림과 정준은 학창시절 연인사이였다. 상희도 또렷하게 기억할만큼 태림은 예쁜 학생이었고 정준과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지만 해언에 비할 게 아니었다. 정준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해언에게로 넘어갔고 태림은 질투에 눈이 멀어있었다. 해언이 죽던 날 정준이 해언을 차에 태우고 어딘가로 가자 태림은 급하게 오토바이를 쓸 수 있는 만우를 찾아가 뒤에 태워달라고 했고 그 날 무언가를 증언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정준이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정준은 태림을 찾아왔고 마치 계약을 하듯 태림에게 청혼을 한다. 태림은 과거 잘못에 대한 죄책감 속에 살면서도 정준의 청혼을 받아들였고 둘은 결혼해 딸을 낳는다. 마치 해언처럼 태어났을 때부터 빛이 나는 예쁜 아이를. 중간중간 태림의 독백이 나오는데 태림은 기독교에 심취해 기도와 회개를 번갈아하며 하고 있었다. 태림의 고백 속에서 종종 해언이 등장했는데 태림은 혼잣말 하듯 해언이 묶인채로 화장실 벽에 스스로 머리를 박아 죽었다고 중얼거렸고 이내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깨달으면 황급히 사실이 아니라고 정정하곤 했다.
정준은 자신의 딸을 엄청나게 사랑했다. 태림은 남편이 어린 딸을 안고 울고있는 모습을 목격한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사랑하는 딸을 그들 부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잃게 된다. 죽음이 아닌 유괴로. 아기는 장을 보러 나간 유모가 CCTV가 없는 사각지대에 유모차를 세워뒀을 때 사라졌고 경찰은 아이를 찾아내지 못했다. 태림은 딸을 잃어버린 후 정신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점점 망가져가고 있었고 정준 또한 모든 일에서 손을 놓아버렸는데, 의외로 정준의 부모는 마치 누구의 소행인지 안다는 것마냥 무언가 찔리는 게 있는 사람들처럼 아이야 하나 더 낳으면 된다는 망언을 해 태림의 마음을 차갑게 식게 만든다.
한편 시간이 흘러 몇년만에 다언을 마주친 상희는 다언의 달라진 모습에 또 한 번 놀라고 만다. 당당당당 웃던 소녀에서 성형부작용이 심해보이던 깡마른 숙녀로 변했던 다언은 또 다시 예전 다언의 모습으로 돌아와있었던 것이다. 살이 오르고 두툼한 점퍼 속에 몸을 감춘듯한 다언은 이 곳에 자주 온다며 상희에게 언니랑 밥 한 번 먹고 싶었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데, 이후로 상희는 다언이 자주 온다는 그 장소에서 다시는 다언을 볼 수 없었다. 마치 그 마지막 말이 다시는 상희를 볼 일이 없다는 말이었던 것처럼. 그 날 상희는 다언이 엄마와 하는 통화내용을 우연히 엿들었는데 거기서 믿을 수 없는 이름을 들었다. 바로 혜은이라는 이름이었다. 혜은인지, 해언인지. 다언은 분명 엄마에게 혜은이는 잘 있냐며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해언은 이미 몇십년 전에 죽었기에 그들 모녀에게는 다른 누군가가 생긴 게 분명했다.
다언은 해언의 이름을 손수 하나씩 혜은으로 바꾸고 '혜은'에게 집착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결심했었다. 엄마에게 '혜은'을 되찾아주겠노라고. 그리고 몇년 후 마치 해언이 환생한 것처럼 아름답게 태어난 정준과 태림의 아이가 유괴됐고 다언과 엄마에게는 '혜은'이 생겼다. 다언은 언제나 만우와 선우 남매 앞에 나서고 싶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들 앞에 나타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한다. 만우는 취업 후 몇년이 지난 뒤 암이 재발해 죽었는데 다언은 그의 장례식에조차 갈 수 없었다. 그 이후에도 다언은 선우에게도 연락하지 못한다. 그럴리 없겠지만 태림과 정준이 과거 해언 사건을 경찰에게 말한다면, 그래서 경찰이 사건을 재조사하기 시작한다면, 그래서 죽은 만우 대신 경찰이 선우를 찾아간다면, 선우 그 선한 아이가 혹여라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이라는 '만에 하나'라는 희박한 가능성에 도박을 걸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모호한 결론을 내며 끝이 난다. 해언을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고 해언이 어떻게 죽었는지, 어쩌다가 죽었는지도 확실하게 밝혀주지 않는다. 그저 추측하게 만들 뿐이다. 그랬기 때문인지 약간 찝찝한 기분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그런 것들에 집중하면 이 책은 사실 별 하나도 아깝지 않을까 싶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다언과 다언의 엄마는 소중한 존재를 잃었을 때 남겨진 사람이 얼마만큼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언니의 죽음 이후 다언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고 이후 너무도 오랜 시간을 그 사건에 얽매인 채 살아간다. 이제는 '혜은'으로 돌아온 다른 존재를 통해 앞으로도 평생 얽매인 채로 살아야 할 것이다. 다언이 죽음은 순식간에 남은 사람들을 '나머지 존재'로 전락하게 만든다고 한 말이 인상깊었다. 다언은 언니가 죽은 뒤 자신을 '나머지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혜은'으로 인해 다언은 몰라도 적어도 엄마에게는 해언이 다시 태어난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리고 '혜은'을 데려옴으로 다언은 어쩌면 태림과 정준을 '나머지 존재'로 만드는 복수를 성공시킨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역시 재미는 없었다.